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11.15~1867.11.15]
일본의 일개의 검색으로서 도막,대정봉환,에도성의 무혈개성,메이지 유신,
그리고 일본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하여
오늘날 일본이 선진국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1835년 11월 15일 지금의 시코쿠[四國] 남부 고치현[高知縣]에 해당하는 도사번[土佐藩]에서 향사(鄕士)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5년 에도[江戶]로 가서 사다키치[定吉] 도장에서 검술을 익히면서 왕권 복구와 서양 척결을 주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의자들과 교유하였다.
1861년 고향에서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에 가담한 뒤, 이듬해 친(親)서양파인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죽이기 위해 다시 에도로 갔다. 그러나 오히려 가이슈의 설득에 감명을 받고, 이때부터 가이슈의 제자가 되었다. 이어 통상과 해운에 눈을 뜬 뒤, 1863년 고베[神戶]에 해운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뒤에 해군지원대로 바뀌었다.
1866년에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을 성사시켜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에도막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듬해에는 막부와 번을 통일시켜 에도막부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역사적인 사건 대정봉환(大政奉還)의 구상을 성사시켰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이래 675년 동안 계속되던 봉건시대가 끝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867년 11월 15일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함께 막부순찰대의 습격을 받아 교토에서 33살의 나이로 암살되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어린 시절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음력 1836년 11월 15일 시코쿠의 도사 번(오늘날의 고치 현) 고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치헤이는 하급무사인 고시(鄕士)계급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울보’로 기억되고 있다. 다른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하면 몇 십리 되는 길을 혼자서 울며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게다가 거미를 매우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는 글을 배워도 속도가 늦고 경서를 가르쳐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기 때문에 집에서도 거의 버려둔 자식이었지만 그를 아끼던 누나 오토메는 그를 검도 도장에 보내 검술을 배우게 했다(료마의 어머니는 1846년 사망). 그런데 료마는 예상 외로 검술에서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료마는 예사롭지 않은 그의 검술 실력 덕분에 그는 1853년 에도로 유학하여 지바 데이키치의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 북진일도류) 도장에서 검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료마가 에도로 유학을 떠난 그 해는 미국의 페리 제독이 전함 4척을 이끌고 와서 일본의 에도 근처 바다에서 통상을 강요한 일명 ‘흑선내항’이라는 사건이 발발한 해였다.
유학시절
1854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류로부터 서양에 대해 배웠으며 185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1856년 다시 에도로 검술을 배우기 위해 떠났다. 1858년에는 도사번이 개최한 검술대회에서 1등을 했으며 다른 검술 대회에서도 우승을 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의 이 에도 유학은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계기였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의 여러 번에서 유능한 인재들이 에도로 검술 유학을 왔기 때문에 그는 검술을 익히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도장의 젊은 엘리트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손노조이(尊皇攘夷, 존황양이)론자들과 사귀며 세상에 눈을 뜨고 그들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다른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고 있던 유명 인물로는 가쓰라 고고로(훗날의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등이 있었으며 이들 무사들은 서양 세력에 굴복하여 개항하려는 막부에 대한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검술로 명성을 얻었으니 낙향하여 도장을 열어 한평생 편안히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불안정 하고 위험한 인생 경로를 택했다. 료마는 1861년 다케치 즈이잔(다케치 한페이타)이 주도한 도사근왕당(도사출신의 하급무사들이 천황을 지키고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자 모인 모임)에 참여했다. 다케치 즈이잔은 번주 요시다 도요에게 번 개혁을 위한 진언을 했지만 거부당했고 그들은 1862년 요시다 도요를 살해했다. 범죄자가 된 료마는 이제 탈번하여 낭인(소속이 없는 사무라이)이 되어 에도로 향했다.
도막운동
탈번한 그 해 그는 개화파 관리 가쓰 가이슈가 서양식 해군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가쓰 가이슈는 오히려 이 암살범을 보고 꾸짖었다. 가쓰 가이슈는 “일본은 외국의 발달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며 료마를 훈계했고 료마는 오히려 가이슈의 설득에 큰 감동을 받아 료마는 그 자리에서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었다.
가쓰 가이슈는 료마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개해주었으며 가쓰 가이슈로부터 서양 문물을 배운 사카모토는 양이에서 개화로 생각이 크게 바뀌며 번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일본국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듬해 그는 가쓰 가이슈를 도와 고베 해군훈련소 설립에 힘썼다. 이렇게 도막파였던 사람이 갑자기 막부의 해군 훈련소 실무자로 둔갑하자 도막파 무사들은 격분하였고 료마는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 그러나 료마는 자신만의 도막론을 꿈꾸며 해군 훈련소를 열심히 운영해 나갔다. 1864년 가쓰 가이슈가 막부에 의해 근신처분을 받고 물러나자 료마는 해군 훈련소를 정리하고 사쓰마의 후원을 받아 가메야마샤추(龜山社中)라는 무역 회사를 설립했는데 이는 동양 최초의 주식회사이다. 이후 가메야마는 가이엔타이(海援隊)로 이름을 바꿨으며 오늘날 미츠비시 그룹의 모체가 되었다. 가이엔타이는 이후 도막파에 군수 보급을 하기도 했다.
삿초동맹
1864년 7월 1일에는 이케다야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던 신센구미(新選組 : 신선조)가 이케다야 여관에 숨어있던 조슈 번 손노조이파를 습격하여 많은 주요 인물들을 살해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막부의 조슈 정벌 전쟁이 발생했고 1차 전쟁으로 조슈 번은 괴멸상태에 빠져있었다. 막부는 2차 정벌로 조슈 번을 초토화 시킨다는 계획이었고 손노조이파는 평민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해 최후의 결전에 임하고 있었다.
당시 도막파의 웅번은 셋, 조슈, 사쓰마, 도사였다. 그러나 손노조이파가 정권을 잡고 도막을 추진하던 번은 조슈번 하나밖에 없었다. 사쓰마와 도사의 손노조이파는 하급무사뿐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사쓰마와 조슈는 견원지간 이었다. 때문에 사쓰마는 조슈를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일의 끝을 지켜보며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다. 만일 조슈가 이대로 막부에 의해 무너지면 도막의 선봉은 사라지고 일본은 다시 막부시대로 돌아갈 판이었다.
료마는 이 사실을 직시하고 사쓰마와 조슈의 중재에 나섰다. 서로 원수지간인 두 번을 료마는 용케 설득시켜 하룻밤사이에 친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조슈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쓰마에 대량의 쌀을 공급하고 사쓰마는 가지고 있던 서양식 총포를 상당량 조슈에 제공했다. 이렇게 사쓰마와 조슈는 1866년 일명 삿초동맹이라 불리는 도막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이는 대정봉환(大政奉還 : 막부가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 것)과 더불어 사카모토 료마의 최대 업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정봉환
조슈와 사쓰마는 힘을 합쳐 천황궁이 있는 교토로 진격했고 교토의 신선조를 비롯한 좌막파는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료마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내전은 나라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생각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고 전쟁을 막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교토로 가는 배 위에서 대정봉환, 상하의정국 설치, 인재 등용과 관제 개혁, 외교혁신, 법전의 제정, 해군 확충, 어친병 설치, 폐제 개혁의 내용을 담은 선충팔책(船中八策)을 작성하였고 같은 고향 출신의 막부 중신 고오토 쇼지로와 도사의 번주 야마노우치 토요시게를 거쳐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건의하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를 받아들였고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대정봉환이 이루어졌다. 정권은 이렇게 막부에서 천황 중심의 조정으로 평화적으로 넘어갔으며 도쿠가와의 에도 막부는 1867을 막을 내렸다. 료마는 또한 에도성의 함락을 염려하여 스승 가쓰 가이슈를 통해 막부를 설득하여 에도성 무혈입성을 이루어 냈다.
쇼군이 천황에게 대정봉환을 고하던 날 밤, 료마는 도막파 지도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새 시대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 청사진에는 내각제, 헌법, 정부, 국회 등이 있는 서양식 국가체제가 제시되어 있었고 각 지도자들이 어떤 관직에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할 것인지가 모두 결정되어 있었다. 그의 청사진은 모든 도막파 지도자들의 중심 생각이 되었고 료마의 청사진은 이듬해 ‘메이지 유신’으로 현실화 되었다. 그리고 료마의 청사진대로 움직여 나간 지도자들은 훗날 유신지사로 불리게 된다.
죽음
대정봉환 후 료마는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에 머물다가 음력 11월 15일인 여관 오미야에서 습격을 받고 피살됐다. 이 암살이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막부측 미마와리구미(見廻組 : 견회조)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한 가운데 신센구미의 소행이라는 설도 있다. 사카모토는 머리에 상처를 입었고 천천히 죽어갔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당시 같이 습격당했던 나카오카가 중태인 가운데서도 3일간 생존했기 때문에 그에 의해 소상히 전해 질 수 있었다. 유족으로 부인 오료와 누나 오토메 등이 있었다.
미마와리구미 소행설은 근거 자료가 있다. 보신 전쟁이 끝나고 체포된 전 미마와리구미의 대원 이마이 노부오가 사카모토 료마 암살은 자신들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하며 당시의 세세한 정보를 모두 말한 것이 강무소 공술서에 기록이 돼있다. 아직까지도 이를 뒤집을 만한 사료는 나오지 않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브리태니커 백과
http://blog.naver.com/shiroyume?Redirect=Log&logNo=150020045173
http://cafe.naver.com/nobutenk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908
일본 드라마속의 '사카모토 료마'
- (좌) 드라마 'JIN' : 우치노 마사아키
(우) 드라마 '아츠히메' : 타마키 히로시
사카모토 료마 피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