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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s 즐거운 이야기

'고품격 리얼리티' 남아공 월드컵 가상 조추첨

by forzalazio 2009. 12. 1.

[김현회] '고품격 리얼리티' 남아공 월드컵 가상 조추첨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 조추첨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아공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내달 5일(한국시간) 케이프타운에서 본선 조추첨 행사를 열고 실질적인 월드컵 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본선에 진출한 32개국은 종이 쪼가리 하나에 울고 웃을 수밖에 없다. 월드컵만큼이나 흥미로울 가상 조추첨을 해봤다. 지금부터 그 준비과정과 결과를 공개한다.


<사진 1 : 가상 조추첨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동네 초등학교 앞 문구점이었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가상 조추첨이지만 ‘리얼리티’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최대한 실제 조추첨 행사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했다. 종이 몇 장 찢어서 제비뽑기 정도로 가상 조추첨 소식을 전하는 건 독자들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고 제대로 구색을 갖추기 위해 나름대로 신경 썼다. 허접한 가상 조추첨은 원치 않는다.

일단 조추첨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건 유리로 된 항아리와 플라스틱 용기였다. 방구석에 언젠가부터 쳐 박혀 있던 실용도 0점짜리 선물, 종이학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고 유리 항아리를 획득했다. 또한 각 팀의 이름을 담을 플라스틱 용기를 구하기 위해서 인근 초등학교 앞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가끔 동전을 넣고 돌려던 ‘뽑기’의 플라스틱 용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가한 오후에 찾은 초등학교 앞에는 초등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 문구점 앞 오락기에 정신이 팔린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 틈에서는 도저히 뽑기를 할 자신이 없어 결국 늦은 밤을 이용해 다시 한 번 문구점 앞으로 갔다. 1그룹에 8팀씩 배정이 되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플라스틱 용기는 8개였다. 500원 짜리 뽑기 8판으로 아까운 돈 4,000원이 날아갔다. 뽑기를 통해 획득한 ‘럭셔리’ 야광 팔찌는 모두 여자친구에게 선물했다. 아직도 그 선물을 받은 여자친구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사진 2 : 지난 2007년 세계 청소년(U-17) 월드컵 조추첨식 모습. 나는 이 모습과 이전 월드컵 조추첨 방식을 그대로 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추첨, 어떻게 이뤄지나?

조추첨 방식은 지난 2006 독일월드컵 방식을 따랐다. 개최국을 포함해 가장 전력이 강한 8개팀을 톱시드로 선정하고 2번 시드부터 4번 시드까지는 대륙별로 안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개최국 남아공을 A1로 정했고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남미 팀이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같은 조에 편성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들이 한 조에 속할 경우 다음 조에 배속하는 규칙을 적용했다. A조의 남아공도 같은 아프리카 대륙 팀이 한 조에 편성되면 B조로 넘기는 방식이다. 이는 지난 2006 독일월드컵에서도 같은 방식이 적용됐다.

일단 톱시드 8개 팀을 A조부터 H조까지 차례로 배분하고 2번 시드부터는 국가를 뽑은 뒤 그 조 번호가 적힌 공을 한 번 더 뽑는 방식도 채택했다. 예를 들어 남아공이 속한 A조에 포르투갈이 속한다고 해 포르투갈이 무조건 A2가 되는 것이 아니라 A3나 A4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는 대회 일정을 짜는 데 필요해 정식 조추첨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방식이다. 대체로 이번 조추첨 역시 지난 관계를 그대로 따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최근 월드컵 2개 대회 성적과 최근 3년간 FIFA랭킹을 합산하고 대륙별 배정 원칙에 따라 시드를 나눴다. 톱시드는 남아공, 브라질,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잉글랜드가 차지했고 2번 시드는 나머지 유럽 팀(덴마크, 포르투갈, 스위스, 그리스,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네덜란드)을 배정했다. 또한 3번 시드는 남은 남미 세 팀(파라과이, 우루과이, 칠레)과 아프리카 다섯 팀(코트디부아르, 알제리, 가나, 카메룬, 나이지리아)을 포함했고 4번 시드는 대한민국, 북한, 일본, 호주 등 아시아 네 개 팀과 온두라스, 멕시코, 미국 등 북중미 세 개 팀, 오세아니아의 뉴질랜드를 포함시켰다.

준비를 모두 마친 대망의 ‘고품격’ 가상 조추첨은 지난 주말 인천의 한 자취방에서 치러졌다. 원래는 세계 각국의 축구계 유명 인사를 대거 초청할 계획이었지만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나의 유일한 위닝 일레븐 친구를 섭외했다. 이 친구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선글라스 착용을 허용했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해 달라”는 친구의 의견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기사 작성이 귀찮아져 “그냥 선글라스로 대체하라”고 넌지시 이야기했다. 상의는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었지만 귀찮아서 바지는 군용 반바지로 대체한 점도 독자들이 이해하길 바란다.


<사진 3 : 가상 조추첨에 앞서 친구와 악수부터 나눴다. 실제 월드컵 조추첨의 웅장함과는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향방은?

행사는 MP3에서 ‘피파 앤섬’이 흘러나오며 성대하게 시작됐다. 유리 항아리에서 뽑기용 플라스틱 용기를 뽑는 가상 조추첨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톱시드 8개 팀을 모두 뽑은 뒤 곧바로 2번 시드 팀을 뽑았다. 2번 시드 중에는 강팀이지만 아깝게 톱시드에 배정받지 못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있어 자취방 안은 긴장감이 흘렀다. 이 팀이 어느 조로 가느냐가 관심을 끌었다. 가장 먼저 탄식한 건 남아공이었다. 포르투갈이 2번 시드 첫 번째 조추첨에서 뽑히면서 A조로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A4에 자리했다. 이어 네덜란드는 브라질이 속한 D조에 D4로 뽑혔다. D조가 ‘죽음의 조’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2번 시드까지 조추첨이 끝나고는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최근 큰 인기를 누리는 여성 그룹 ‘카라’를 자취방으로 초대했다. 나와 친구는 컴퓨터 모니터 속의 ‘카라’가 흔드는 엉덩이를 보며 가상 조추첨이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카라’도 우리의 조추첨을 축하해 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카라’의 공연이 끝난 뒤에는 세계적인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놀라운 마술쇼가 컴퓨터 모니터로 방영됐다.

축하 공연이 끝난 뒤 3번 시드 추첨이 이어졌다. 3번 시드 A조 추첨에서 아프리카의 가나가 뽑혔다. 하지만 가나는 이미 A조에 확정된 남아공과 같은 대륙이어서 B조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나이지리아는 아르헨티나와 한 조가 됐고 브라질, 네덜란드가 속한 D조에는 코트디부아르가 자리했다. D조는 누가 봐도 ‘죽음의 조’라 부를 만했다. 나머지 팀들도 하나씩 각 조에 자리하게 됐다.


<사진 4 : ‘카라’는 이날 가상 조추첨 행사 축하 공연에 초대돼 자리를 빛냈다. 비록 컴퓨터 모니터 안이었지만.>

4번 시드, 긴장감의 연속

마지막으로 4번 시드 추첨을 시작했다. 호주와 멕시코는 각각 A조와 B조에 뽑혔고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 그리스가 속한 C조에는 미국이 자리했다. 이어 ‘죽음의 조’인 D조 추첨이 이뤄졌다. 친구는 유리 항아리 속 공들을 휘휘 휘젓더니 하나를 집어 들어 나에게 넘겨줬다. 과연 강팀들이 즐비한 D조에 속할 팀을 누가 될 것인가. 아무리 가상 조추첨이라지만 긴장된 순간이었다.

내가 연 공에는 선명한 글씨가 써져 있었다. ‘Korea Republic’ 젠장, 우리나라였다. 브라질, 네덜란드, 코트디부아르가 속한 ‘죽음의 조’에 우리나라가 들어갔다. “야, 그냥 다시 할래? 이러면 독자들이 믿지 않을 수도 있어. 꼭 짜고 한 거 같잖아.” 친구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리얼리티’가 생명인 이번 기사를 조작할 수는 없었다. 장담컨대, 가상 조추첨에 조작은 단 1%도 없었다. 이어 남은 4번 시드 팀의 추첨이 이어졌다. 완료된 조추첨은 다음과 같다. 이 조편성대로라면 남아공과 호주가 개막전을 치른다. 북한은 상대적으로 해볼 만한 상대인 알제리와 한 조가 돼 44년 만에 월드컵 승리를 노릴 수 있게 됐지만 한국은 D조에서 브라질, 네덜란드, 코트디부아르와 힘겨운 승부를 펼쳐야 한다.

A조 : 남아공, 호주, 우루과이, 포르투갈
B조 : 스페인, 슬로바키아, 멕시코, 가나
C조 :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미국, 그리스
D조 : 브라질, 한국, 코트디부아르, 네덜란드
E조 : 잉글랜드, 덴마크, 뉴질랜드, 파라과이
F조 : 독일, 북한, 세르비아, 알제리
G조 : 프랑스, 슬로베니아, 칠레, 온두라스
H조 : 이탈리아, 일본, 스위스, 카메룬


<사진 5 : 한국은 실제 조추첨에서 어느 팀과 맞붙게 될까. 많은 이들이 ‘희망의 조’와 ‘죽음의 조’를 논하지만 사실 월드컵에 나서는 32개 팀 전력에는 큰 차이가 없다. 잘하는 팀만 나왔다.>

‘희망의 조’는 없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이 속한다고 해 ‘희망의 조’가 될 만한 조도 없다. 남아공과 우루과이, 포르투갈, 호주가 속한 A조에 호주 대신 한국이 들어갔다거나 이탈리아, 스위스, 카메룬과 한 조가 된 일본 자리를 한국이 대신 차지했어도 쉽지 않은 승부를 펼쳐야 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그나마 프랑스, 슬로베니아, 칠레, 온두라스가 속한 G조가 가장 만만해 보이지만 한국이 온두라스 대신 이 자리를 차지했다 해도 이러한 사실이 16강행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우리가 박수 치면서 환호할 동안 슬로베니아와 칠레도 우리를 ‘1승 제물’로 환영할 것이다.

치열한 대륙별 예선을 뚫고 올라 온 32개 팀 중 만만한 팀은 단 하나도 없다. 네 팀 중 가장 많이 준비하고 집중력을 발휘하는 두 팀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것이지 월드컵에 애초부터 ‘죽음의 조’나 ‘희망의 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의 조’라는 핑계는 결국 조별 예선탈락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변명일 뿐이다. 나는 한국이 조추첨 하나로 희망을 갖거나 절망하는 것보다는 그럴 동안 이에 맞는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친구와 두 시간 넘게 낑낑대며 진행한 ‘고품격 리얼리티’ 조추첨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야, 어느 조에 들어가도 다 만만치 않아. 그냥 술이나 먹자.”

footballavenue@nate.com

출처 : http://news.nate.com/view/20091130n04999?mid=s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