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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S 유명인 이야기

로베르토 바조, 이카로스의 꿈을 꾼 사나이

by forzalazio 2009. 10. 5.
이 글은 www.dvdprime.com 의 axl18 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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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첸차에서 플레이를 하는 로베르토 바조 from Paran 블로거 'Calcio'님

 

 이야기의 시작은 14세에 3부 리그 비첸차에 스카우트된 이후입니다. 당시 세리아 규정에 따라 16세가 됐던 83/84시즌에 드디어 시합에 나서게 됩니다. 물론 쉽진 않았습니다. 그의 커리어가 끝나는 시점까지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닌 부상이란 악령이 16세가 된 'Roberto BAGGIO'를 엄습했으니까요. 16세가 되는 순간 왼쪽 다리의 반월판을 부상당합니다. 시즌이 끝나기 전에 간신히 공식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던 거예요.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Roberto BAGGIO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4/85시즌부터입니다. 그는 총 34경기에 출전해서 14골을 넣었습니다. 이 활약을 통해서 비첸차는 3부 리그에서 2부 리그로 승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활약을 눈여겨보던 1부 리그의 피렌체가 BAGGIO를 스카우트하죠.

 18세의 어린 BAGGIO는 피렌체에 입단하는 순간 큰 시련을 겪습니다. 오른쪽 무릎 인대가 찢어진 것입니다. 최소 1년은 그라운드에 설 수 없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당시 이와 같은 유형의 부상을 당하면 약 95%가 다시는 축구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이니까요.  

 220바늘을 꿰맸습니다. 한데 BAGGIO는 약물에 대한 알레르기 증상이 있어서 진통제 등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고통에 울부짖기도 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수술을 받고 1년이 지났을 때 그는 그라운드에 복귀를 합니다. 이어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습니다. 비첸차에서 당했던 부상이 반복됐습니다. 다시 반월판을 다쳤고 그는 또다시 수술대 위에 올라서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Roberto BAGGIO는 끝났다고 말을 했습니다. 10대 후반의 선수가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해 2년 동안 그라운드를 떠나있게 됐으니 말이죠. 그러나 그는 '경기를 뛰고 싶다'는 신념 하나로 버텼습니다. 그리고 일어섰습니다. 당시에 그의 육체적인 고통을 이겨내는데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불교 사상'은 가톨릭의 국가 이탈리아에서 찾기 힘든 불교신자를 낳게 했습니다. 네, BAGGIO는 유명한 불교신자입니다. 

- 그의 어머니께서는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교도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입장을 밝힌 상태입니다. 몇 년 전 이뤄진 어머니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그러나 내 아들이 다시 가톨릭에 귀화할 수 있기를 매일 기도한다'라 말씀을 하셨더군요. :-) -  

 Roberto BAGGIO는 87/88시즌에 이르러서야 세리아 A 무대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등장을 알립니다. 그의 첫 골은 매우 값졌습니다. 'Diego Armando Maradona'가 버티고 있던 나폴리를 상대로 그 골을 터뜨립니다. 강등권 위기에 처해있던 피렌체를 구해내는 골이었습니다. 스쿠데토를 차지하는 것을 확정지으려던 나폴리는 그 일을 다음 경기로 미루게 됐고요.  

 한편 87/88시즌부터 이듬해인 88/89시즌까지 'Sven-Goran Eriksson' 감독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는데, Roberto BAGGIO는 개인적으로 행복했던 시절이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감독과 궁합이 잘 맞았다고 하네요. 심리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그가 21세가 됐던 88/89시즌에는 40경기에 출전해 24골을 기록하게 됩니다. 당연히 이탈리아 축구계는 젊은 천재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들끓었습니다. 이와 같은 활약상을 통해 BAGGIO는 90년 이탈리아 대표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국가대표 데뷔전은 네덜란드와의 친선경기였습니다. 이 경기에서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이탈리아는 네덜란드에 1:0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Roberto BAGGIO의 피렌체에서의 활약상(동영상 끝 부분을 보시면 BAGGIO의 이적에 항의하는 젊은 피오렌티나 팬들의 시위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폭동으로 변질되죠)// http://www.youtube.com/watch?v=HcTS9H0usf0

 

 이제 자국에서 열린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대회에 23세의 Roberto BAGGIO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탈리아 대 체코와의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실로 강렬한 등장이었습니다. 월드컵 역사에 남을 환상적인 득점을 했기 때문입니다. 공격형 미드필더인 등번호 13번 'Giuseppe GIANNINI'와의 2:1패스에 이은 하프라인에서부터의 질풍 같은 돌파가 이뤄집니다. 완벽한 개인전술에 의해 나올 수 있었던 슈팅이 체코의 골망을 가르는 순간, 이탈리아 전역에서 BAGGIO 열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결국 다음 경기부터 선발 출전하는 기회를 얻게 될 정도였죠.(이 골을 보고 Madonna가 반해 BAGGIO에게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신청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탈리아 대 체코전// http://www.youtube.com/watch?v=KlV5oWn2eTo

 

 허나 16강전과 8강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Roberto BAGGIO는 4강 아르헨티나전에서 벤치에 앉게 됩니다. 큰 상관은 없었죠. 당시 이탈리아는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습니다. 경기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르헨티나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을 펼칩니다. 전반 17분경 Salvatore SCHILLACI 의 골로 앞서나갑니다. 5경기 무실점을 자랑하던 이탈리아였기에 아무도 그들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죠. 게다가 상대는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아르헨티나였으니까요. 당시 이탈리아 현지 방송 클립을 보니 아르헨티나의 GK인 'GOYCOCHEA'에 대해서만 계속 감탄을 하더군요. 그만큼 아르헨티나는 수비만 했다는 뜻입니다. 

 수세에 몰리던 아르헨티나는 후반 67분경 'Claudio CANIGGIA'의 헤딩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립니다. 후반 73분경, 이탈리아는 활약이 좋지 않던 'Giuseppe GIANNINI'를 빼고 Roberto BAGGIO를 투입합니다. 날카로운 슈팅을 날리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당시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아르헨티나의 수문장인 GOYCOCHEA의 벽을 뚫지 못했습니다.  

 결국 승패는 승부차기로 가려졌습니다. Roberto BAGGIO는 두 번째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러나 최종 스코어는 3:4 이탈리아의 패배. 마지막 키커로 나서 실축한 'Aldo SERENA'는 훗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난 나서기 싫다고 감독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승부차기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결국 내가 찼어야만 했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던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에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4강에서 멈추게 됩니다.  

이탈리아 대 아르헨티나전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Oqe992eGDlk&feature=PlayList&p=FCF0FCA18810C0ED&playnext=1&playnext_from=PL&index=3

 

 3-4위 결정전 상대는 잉글랜드, Roberto BAGGIO는 다시 선발로 출전합니다. 시종일관 날카로운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다음 월드컵에서의 대활약을 예고합니다. 그는 이 경기에서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환상적인 돌파력, 정확한 슈팅력, 센스 있는 패스와 넓은 시야까지 판타지 스타가 갖춰야만 하는 모든 것을 보여줬습니다.  

 Roberto BAGGIO가 중앙선부터 돌진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 플레이를 통해 Salvatore SCHILLACI는 패널티킥을 얻어낼 수 있었고 그가 PK를 처리합니다. SCHILLACI, 이 득점으로 이탈리아 월드컵의 득점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이탈리아의 2:1 승리.  

이탈리아 대 잉글랜드전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00OWjNZ2SFY

 

 

  유벤투스에서 로베르토 바조

 

 Roberto BAGGIO는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이 끝난 후,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로 착실하게 성장해나갑니다.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 피오렌티나에서 유벤투스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되고 이와 동시에 최고 이적료 기록을 경신합니다. 1,200만 유로였습니다. 한편 BAGGIO는 자신이 원한 이적결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단에 의해 이적에 동의하도록 강요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피오렌티나 팬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5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실 당시 피오렌티나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만한 결정이었습니다. 폭동 이후, BAGGIO와 함께 피오렌티나를 이끌던 대부분의 주축선수들 역시 다른 팀으로 팔려나갔을 정도였으니 말이죠. 

 한편 91/92시즌부터 93/94시즌까지 유벤투스의 감독을 맡았던 이는 훗날 대표적인 anti-BAGGIO가 되는 명장 'Giovanni Trapattoni'였습니다. BAGGIO는 당시 Trapattoni가 매우 좋은 감독이었으며 자신들을 가족적으로 대해줬기에 편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습니다.  

 Roberto BAGGIO는 92/93시즌에 유벤투스가 EUFA컵을 탈 수 있게끔 대활약을 펼칩니다. 9경기 출전 6득점. 리그에서는 27경기 출전에 21골을 기록합니다. 그는 이 활약상을 인정받아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를 동시에 석권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유벤투스 시절 활약상//

1부) http://www.youtube.com/watch?v=rXJxJ6X29RE&feature=related

2부) http://www.youtube.com/watch?v=uDezHjS-mmM&feature=fvw

 

 개인기량이 절정에 이른 시점, 94년 미국 월드컵이 열립니다. 수많은 축구팬들이 Roberto BAGGIO를 위한 대회가 될 것이라 기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별 예선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BAGGIO는 침묵합니다. 공격의 핵심이 무기력해지자 이탈리아의 경기력이 저하됩니다. 노르웨이전에서 홀딩 'Dino BAGGIO'의 골이 없었다면, 멕시코전에서 33세의 노장 공격수 'Daniele MASSARO'의 득점이 없었다면 이탈리아는 조별 예선 탈락이었을 것입니다. 3경기 1승 1무 1패, 2득점 2실점이라는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선 두 번째 경기인 노르웨이전에서 전반 21분경, 이탈리아의 골키퍼인 'Gianluca PAGLIUCA'가 퇴장을 당합니다. 놀랍게도 22분경 2군 GK였던 'Luca MARCHEGIANI'가 그라운드에 들어오기 위해 교체됐던 선수는 Roberto BAGGIO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당시부터 감독 'Arrigo SACCHI'와 BAGGIO 사이에 불화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Roberto BAGGIO를 빼라'는 성난 이탈리아 축구팬들과 언론의 얘기를 뒤로 하고 SACCHI 감독은 16강전에 BAGGIO를 선발출전 시킵니다. 예상외로 나이지리아는 거세게 이탈리아의 골문을 위협합니다. 그리고 전반 25분, 'Emmanuel AMUNIKE'가 득점에 성공합니다. 나이지리아의 1:0 리드. 

 시간은 흘러 후반 65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던 공격수 'Giuseppe SIGNORI'는 같은 포지션의 선수 'Gianfranco ZOLA'와 교체됩니다. 그러나 후반 75분, 'Gianfranco ZOLA'가 퇴장을 당합니다. 가뜩이나 나이지리아의 날카로운 공격력에 당황하던 이탈리아는 수적 열세로 인해 본격적으로 농락당하기 시작합니다. 패배의 수렁으로 빠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경기를 지켜보던 저의 경우엔 '끝났다'고 확신했을 정도입니다. 나이지리아 선수들의 뛰어난 개인기량에 이탈리아 미드필더와 수비수들 중 몇 명이 다리에 쥐가 나 경기장에 쓰러질 정도였으니까요.

 

 

                                    후반 88분, 침묵하던 로베르토 바조의 극적인 득점

 

 패색이 짙던 후반 88분, 드디어 이탈리아의 영웅이 포효합니다. 예선전부터 무기력한 경기력으로 자국 축구팬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던 Roberto BAGGIO가 득점에 성공을 한 것입니다. 이를 기점으로 연장전에서는 그의 돌파력이 살아나면서 나이지리아 수비진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나이지리아 공격수들은 후반 중반 이후 이탈리아 수비 진영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없게 됩니다. 한 명의 공격수가 자신들의 수비진을 흔들기 시작한 까닭에 팀 전체가 수비진영을 구축하는데 보다 많은 신경을 쓰게 됐으니까요. 연장 전반 10분경, 그의 로빙패스를 받으러 돌진하던 'Roberto MUSSI'는 패널티킥을 얻어냅니다. BAGGIO가 마무리 짓습니다. 최종 스코어 2:1 이탈리아의 승리. 

이탈리아 대 나이지리아전 링크//http://www.youtube.com/watch?v=mFFXdDAKnU8

 

 8강전 상대는 스페인이었습니다. 전반 25분, 이탈리아의 좌측 윙어 16번 'Roberto DONADONI'의 패스-> Dino BAGGIO의 중거리 슛으로 앞서나갑니다. 그러나 중원을 장악한 스페인은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습니다. 계속해서 공세를 취하다 후반 58분경 환상적인 패스에 의한 득점을 터뜨립니다. 3번 'Jorge OTERO'의 커트-> 10번 'BAKERO'의 패스-> 12번 'SERGI'의 돌파 후 패스-> 21번 'LUIS ENRIQUE' 의 이탈리아 수비수와의 몸싸움을 통한 패스-> 다시 공을 잡은 12번 'SERGI'의 패스-> 중앙 돌파를 하던 미드필더 15번 'CAMINERO'의 마무리 득점. 빠르고 아름다운 골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보며 감탄하던 기억이 나네요. 

 스페인의 더욱 거센 공격이 이어집니다. 스페인의 입장에서 19번 'JULIO SALINAS' 의 1:1찬스 실패는 뼈아팠습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는 후반 87분경, Roberto DONADONI의 전진 크로스-> 'Giuseppe SIGNORI'의 패스-> Roberto BAGGIO가 우측 사각지대에서 세계 최고의 GK 중 한 명인 'ZUBIZARRETA'를 제치며 결승골을 터뜨렸기 때문입니다.  

 한편 Roberto BAGGIO에 대한 전 세계적인 열풍이 일기 시작합니다. 결승 토너먼트에서 결정적인 골을 연이어 터뜨린 덕분에 말이죠. 손으로 하는 스포츠가 아닌 발로 하는 스포츠에서, 그것도 전체 22명이 뛰는 단체 구기 종목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축구팬이라면 아실 것입니다. 당연히 현지에서는 그 인기가 광풍이 몰아친 수준이었죠. 스페인과의 8강전이 끝난 후, 자국 축구팬들은 벌써부터 82년 스페인 월드컵 우승의 주역인 'Paolo Rossi'와 BAGGIO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득점왕과 함께 자국에 월드컵을 선물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 위로는 Roberto BAGGIO의 대형 걸개그림이 걸립니다.

이탈리아 대 스페인전 링크//http://www.youtube.com/watch?v=8rAu9HjQHDY&NR=1

 

 4강전 상대는 8강전에서 독일에 2:1로 역전승을 거두며 94월드컵의 최고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불가리아였습니다. 그러나 Roberto BAGGIO의 컨디션이 올라오면서 이탈리아의 전력이 강해진 상태였습니다. 전체 경기를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탈리아는 강력한 중원 압박과 적극적인 좌우 풀백의 날카로운 오버래핑 등을 완벽하게 보여줬습니다. 콤팩트 사커의 창시자인 Arrigo SACCHI 감독은 자신이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완벽에 가까운 그것의 위용을 보여줬습니다. 세부적으로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등번호 11번 초일류 앵커 'Demetrio ALBERTINI'와 초일류 홀딩 13번 Dino BAGGIO의 완벽한 중원장악이 이뤄졌습니다. 특히 이 경기에서 Demetrio ALBERTINI는 날카로운 전진 크로스를 계속해서 자신의 공격수들에게 보냈습니다. Roberto BAGGIO의 두 번째 골은 그의 택배 크로스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가장 눈에 띈 선수는 Roberto BAGGIO였습니다. 첫 번째 골을 보시길 바랍니다. 완벽한 개인전술에 의한 골. 팀원들의 패스도 감독의 전략과 전술도 필요 없던 순간입니다. 그는 전반전에만 두 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칩니다. 결국 이탈리아는 2:1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 해설자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완전 BAGGIO 파티네요.'

이탈리아가 골을 넣은 장면만 링크(불가리아는 패널티킥에 의한 골이었기 때문에 생략)// http://www.youtube.com/watch?v=c47T0SUoxk0

 

 16강전부터 4강전까지 이탈리아는 총 6득점을 했고 이 중 5골이 Roberto BAGGIO의 몫이었습니다. 실로 무시무시한 활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문제가 생깁니다. 불가리아전 후반, BAGGIO가 부상을 당하고 교체된 것입니다. 

 7월 17일 결승전이 열린 장소는 LA의 로즈볼 경기장, 94,194명의 관중이 꽉 들어찬 상태. 상대는 24년 만에 축구제국의 위용을 되찾으려고 하는 브라질이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최선진 전술인 콤팩트 사커의 위력을 그 누구보다도 잘 보여주고 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포메이션과 선수 구성은 이탈리아와 거의 동일했습니다. 이탈리아에 홀딩 Dino BAGGIO와 앵커인 Demetrio ALBERTINI가 있다면, 브라질에는 홀딩 'MAURO SILVA'와 앵커인 'DUNGA'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 Paolo MALDINI와 'Roberto MUSSI' 좌우 풀백이 있으면, 브라질에는 'BRANCO'와 'JORGINHO'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브라질의 투톱은 당대 최강의 듀오인 'ROMARIO'와 'BEBETO'로 이뤄져있었죠. 거의 모든 공수 라인업에서 이탈리아에 비해 브라질이 더 강했고 실제로 훨씬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습니다.

 현지 시각 12:30분,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립니다. 그 순간부터 브라질의 맹공이 펼쳐집니다. 사실상 이탈리아는 별다른 찬스를 만들지 못합니다. 경기가 0:0 승부차기까지 간 것은 이탈리아 수비진의 혼신의 힘을 다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브라질 공격수들의 실수 탓도 컸습니다. 이탈리아의 감독인 Arrigo Sacchi가 경기가 끝난 후 '브라질이 이겼어야 했던 경기이며 그들은 승리할 자격이 있었다'고 말했을 정도이니까요. ROMARIO의 경우, 훗날 인터뷰에서 '힘들었던 경기는 8강전인 네덜란드와의 대전이었지 결승전은 어이없는 실수만 없었다면 쉽게 잡았을 경기였다'고 술회했습니다. 

 경기가 어떻게 흘러갔든 승패를 정하는 일이 승부차기까지 갔으면 설사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준 팀이라 해도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법입니다. 이탈리아 축구팬들의 심정이야 '경기 내용이 어찌됐든 승리를 거두면 그만인 것'은 당연지사였을 테죠.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결승전 승부차기가 시작됩니다. 이탈리아가 낳은 위대한 스위퍼 'Franco BARESI'는 첫 번째 키커로 나와 공을 하늘에 날립니다. 그럼에도 그의 실축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브라질의 첫 번째 키커인 'MARCIO SANTOS'의 슈팅을 이탈리아 GK 'Gianluca PAGLIUCA'가 막아냈기 때문입니다. 이어 두 번째 키커 이탈리아의 ALBERTINI와 브라질의 ROMARIO는 모두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킵니다. 세 번째 키커 'Alberigo EVANI'와 BRANCO 역시 모두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네 번째 키커 'Daniele MASSARO'의 발을 떠난 공은 브라질의 수문장 'TAFFAREL'의 선방에 막힙니다. 브라질의 네 번째 키커는 캡틴 DUNGA.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킵니다. 이제 3:2로 브라질이 앞서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마지막 키커가 성공을 해도 브라질의 마지막 키커가 성공을 하면 게임은 브라질의 승리로 돌아가게 된, 이탈리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죠. 

 이탈리아의 마지막 키커는 Roberto BAGGIO.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평소보다 약간 뒤로 물러서서 슈팅을 날립니다. 그는 좌측상단을 노렸습니다. TAFFAREL을 완전히 속입니다. 브라질의 골키퍼는 몸을 우측으로 움직였으니까요. 허나 공의 궤적이 문제였습니다. BAGGIO의 발을 떠난 공은 크로스바 위를 날아갔습니다. 경기 끝. BAGGIO는 고개를 숙였고, 브라질의 모든 선수들은 그라운드 위로 나와 승리의 기쁨을 나눕니다. 

이탈리아 대 브라질전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WX8WNeIdmLo&feature=related 

Roberto BAGGIO와 94년 미국 월드컵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IahGKNqAF-s&NR=1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로베르토 바조

 

 이 순간 이탈리아 현지, 로마의 트레비 분수 위에 걸려있던 Roberto BAGGIO의 대형 걸개그림이 난도질을 당합니다. 수많은 팬들이 패배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기 시작합니다. 언론 역시 그와 관련한 우호적인 기사에서 비난 일색의 기사로 신문과 방송을 도배합니다. BAGGIO는 한 순간에 영웅에서 역적이 됐습니다. 그 만큼 이탈리아 축구팬들에게 Roberto BAGGIO란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덧붙여 Arrigo SACCHI감독과의 관계도 파탄납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네요. 기사를 찾아봤지만 명확한 이유를 알려주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견입니다. 월드컵에 있어서 거의 100%에 가까운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Roberto BAGGIO였기에 한 명의 선수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 그만이라는 식의 분위기가 흐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BAGGIO의 측근들의 인터뷰를 보면 비슷한 뉘앙스로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실상 이탈리아 축구가 전례 없이 1인 중심의 시스템을 가동했던 것 등을 고려하면, 단순한 소문으로 그칠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여하튼 BAGGIO의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됩니다.(아마도 1차 고난의 행군은 그가 당했던 심각한 부상이라 할 수 있겠죠) 앞선 분위기는 오랜 기간 지속됩니다. 선수로서 정신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당시 상황을 보죠. 감독의 입장을 고려해보시길!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선수란 점 또한 자신의 전술이 아닌 BAGGIO를 위한 전술을 만들게 될 공산이 크단 점 등이 겹쳐져 이탈리아의 많은 감독들이 대대적으로 그의 영입을 보이콧합니다. 언론에서는 그가 '감독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덧붙여 선수단의 불화를 조장하는 선수'라는 식의 유언비어를 유포합니다. 94년 월드컵 이전에는 어떠한 감독이라고 해도 언론이라고 해도 쉽게 꺼내지 않던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94/95시즌 유벤투스를 이끌게 된 'Marcello LIPPI' 감독은 전성기 나이에 접어든 BAGGIO를 벤치에 앉힙니다.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BAGGIO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됩니다. 게다가 BAGGIO의 후계자라 평가를 받던 'Alessandro DelPiero'가 급성장하면서 벤치를 지켜야만 하는 횟수가 더욱 늘어났죠.

 BAGGIO는 은퇴한 후 작성한 자서전에서 "LIPPI는 나에게 '라커룸에서 자신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리고 벤치에 앉게 되는 일이 잦아지게 됐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습니다.(인터 밀란에서의 사건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이 시즌이 끝난 후, 유벤투스는 연봉 1/3삭감 등을 내세우면서 사실상 BAGGIO를 방출합니다.

 

 

                                     AC밀란에서의 로베르토 바조

 

 AC 밀란에서 Roberto BAGGIO를 영입합니다. 구단주의 입김이 절대적이었죠. 95/96시즌 Roberto BAGGIO는 경기에 중용됩니다. 그러나 성적은 좋지 않았습니다. 감독은 명장 'Fabio Capello'. 이 감독의 성향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승리를 거두기 위한 축구를 구사합니다. 아름다운 축구엔 관심이 없는, 효율적인 축구를 구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명감독입니다. 냉정하게 말을 하면 선수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위치에서 그 롤이 요구하는 최선의 플레이를 보여주면 그만입니다. 전술을 우선시하는 스타일이라 볼 수 있겠죠. 개인전술을 바탕으로 하는 BAGGIO의 플레이 스타일과는 궁합이 맞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Capello의 입장에서는 그가 계륵입니다. 아니 그의 스쿼드에는 포함되기 힘든 선수일 뿐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94/95시즌부터 계속된 문제를 겪으면서 폼이 하락한 Roberto BAGGIO는 잉글랜드에서 개최된 유로 96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면, 그가 아무리 소속 클럽에서 활약이 좋았다고 해도 과연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인 Arrigo SACCHI가 그를 썼을지 의심이가긴 하네요.  

 AC 밀란에서의 입지는 96/97시즌에 가장 약화됩니다. 94 미국 월드컵 결승전 이후, 최악의 관계로 변해버린 Arrigo SACCHI가 감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이죠. 이제 BAGGIO는 벤치를 본격적으로 달구기 시작합니다. 선발 출전은 주전 선수들이 부상을 당해야만 가능하게 됩니다. 그는 교체선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묘한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BAGGIO는 '이 기간 동안 몇몇 동료들과도 좋지 않은 관계가 형성됐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97/98시즌을 앞두고 Capello가 다시 AC밀란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BAGGIO는 Capello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신이 앞으로 그의 스쿼드에 들 수 있는가를 묻기 위해서였죠. Capello는 '젊은 선수들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겠다'고 답합니다.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경기에 출전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평생의 소원인 월드컵을 들어올리기 위해 이적을 결심합니다.  

 'Roberto BAGGIO는 한물간 선수다'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을 때, 우선 그를 원했던 팀은 파르마입니다. 정확히 말을 하자면 파르마 회장이 그를 원한 것이죠. 그러나 당시 파르마의 감독은 떠오르는 명장 'Carlo Ancelotti'. 그는 전략과 전술을 무시하는 선수인 BAGGIO의 영입을 결사반대합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나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BAGGIO를 택할 것인가!'라는 유명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 해외 클럽에서 엄청난 돈을 미끼로 BAGGIO를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일본의 경우가 가장 심했습니다.(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의 그의 인기는 정말 폭발적이었습니다) 클럽의 입장에서야 더 많은 돈을 벌어다줄 수 있는 슈퍼스타 Roberto BAGGIO를 보유하는 게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겠죠. 허나 그는 거절합니다. '돈이 축구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얘기를 하면서 말입니다. '대표팀에 선발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세리아 A에 남아있어야만 한다'는 생각도 작용했을 거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볼로냐에서의 로베르토 바조

 

 결국 BAGGIO는 그의 수준과는 어울리지 않는 중소규모의 클럽인 볼로냐로 이적을 하게 됩니다. 불과 2년 전에는 3부 리그까지 추락했던 클럽입니다. 현지에서는 충격적인 결정이라 말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자랑하는 영웅이 그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클럽에서 뛰게 됐기 때문이죠.  

 여하튼 여기에서도 감독과의 불화는 계속됐습니다. 애초 Roberto BAGGIO란 선수를 감독이 아닌 회장이 원해서 영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Renzo Ulivieri' 감독은 그의 영입이 결정됐을 때 '세리아 B리그로 다시 떨어질 것'이라는 망언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31세의 슈퍼스타는 나이를 믿기 힘들 정도의 최고 수준의 플레이를 볼로냐에서 보여줍니다. 말총머리를 자르며 자신의 부활을 향한 의지를 보여준 것처럼 33경기에 출전해 무려 23골을 터뜨립니다. Ulivieri 감독과의 관계는 BAGGIO가 더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악화됐고, 결국 시즌 종료 후 다른 팀으로 이적을 하게 만든 원인이 됐습니다. 

Roberto BAGGIO의 볼로냐에서의 활약상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CqCQ3Vdebr8

 

 한편 98 프랑스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인 'Cesare MALDINI'는 Roberto BAGGIO를 스쿼드에 포함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97/98시즌 BAGGIO의 부활로 인해서 절대 다수의 축구팬들과 매스컴이 합심해 그의 월드컵 출전을 요구하게 됩니다. 급작스레 상황이 반전되면서 마침내 MALDINI 감독은 자신의 스쿼드에 BAGGIO를 포함시킵니다. 

 월드컵 예선 첫 경기 상대는 칠레였습니다. Cesare MALDINI 감독은 94년도에 이어 4-4-2 포메이션을 사용합니다. 본래 쉐도우 스트라이커의 자리에는 떠오르는 샛별 Alessandro DEL PIERO가 있었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경기에 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Roberto BAGGIO가 선발출전의 기회를 차지하게 됩니다.

 칠레는 프리메라리가 최고의 명문팀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면서 득점왕을 차지했던 등번호 9번의 'Ivan ZAMORANO'와 포스트 ZAMORANO라는 평가를 받았던 11번 'Marcelo SALAS' 투톱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공격축구를 구사했습니다. 두 명의 공격수는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나란히 최다 득점을 차지할 정도의 위력을 보여줬습니다. 이들을 앞세운 칠레는 이탈리아와의 격돌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경기를 펼칩니다. 

 선취골은 이탈리아가 넣습니다. 전반, Paolo MALDINI가 칠레의 패스를 차단하고 최후방에서 전방에 위치한 Roberto BAGGIO를 향해 초장거리 전진 크로스-> BAGGIO는 원터치로 자신의 우측에서 골대를 향해 쇄도하는 Christian VIERI에게 패스->VIERI의 침착한 마무리. 전형적인 이탈리아 축구의 한방 공식이 나온 것이죠. 그러나 칠레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전반 추가시간에 동점골을 만듭니다. 'Fabian ESTAY'의 좌측 코너킥-> ZAMORANO의 'Pedro REYES'를 향한 헤딩 패스-> 얼떨결에 REYES가 왼발을 내밀어 공을 처리-> SALAS의 골. 전반 마무리. 

 후반 시작 4분 만에 'Moises VILLARROEL'의 크로스를 Marcelo SALAS가 높이 뛰어올라 헤딩슛을 합니다. SALAS 앞에는 대인마크와 존마크의 달인인 'Fabio CANNAVARO'가 있었지만, 기세가 오른 그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득점. 경기는 칠레의 2:1리드. 이후 이탈리아도 득점을 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치면서 경기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펼쳐집니다.  

 이탈리아의 패색이 짙어지던 후반 85분, 다시 BAGGIO의 활약이 나옵니다. 자신의 앞을 막고 있던 센터백 'Ronald FUENTES'의 팔을 향해 공을 찬 것이죠. 영악한 플레이를 통해 패널티킥을 얻었고, 놀랍게도 그 처리를 자신이 직접 합니다. 94년 월드컵의 결승전 악몽을 날리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골을 넣은 뒤, 별다른 세레모니 없이 묵묵히 본래의 위치로 돌아갑니다.  

 경기 결과는 2:2. Roberto BAGGIO는 칠레와의 경기에서 1득점 1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다시금 이탈리아를 살려냅니다. 

이탈리아 대 칠레전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Ccrl8U5AGyY&feature=related

 한편 94년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 실축 장면과 98년 월드컵의 칠레전 페널티킥 성공 장면을 이으면 좋은 이야기가 될 거라 확신한 한 기업에서 Roberto BAGGIO를 모델로 한 선전을 만들었습니다. 멋진 CF이니 한번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CF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gTCCqqb6mSQ&feature=related

   

 예선 마지막 경기인 이탈리아 대 오스트리아전, Cesare MALDINI 감독은 BAGGIO 대신 DEL PIERO를 선발로 출전시킵니다. 원래 베스트 일레븐이었던 DEL PIERO였기에, 컨디션을 확인하기 위해 그를 선발 출전시키겠다는 결정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DEL PIERO의 활약은 단 한 번에 그치게 됩니다. 후반 49분경, 프리킥 찬스에서 VIERI의 머리로 정확한 크로스를 날린 것 말예요. 그는 결국 후반 72분 BAGGIO와 교체됩니다. 그리고 후반 89분경, BAGGIO는 인자기의 패스를 받아 결승골을 넣습니다. 추가시간에 오스트리아에 패널티킥을 내줘 실점을 했으니, 만약 그의 골이 없었다면 1:1 무승부로 경기가 끝이 났겠죠. 

이탈리아 대 오스트리아전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vaobc0UX_2E

 

 16강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선수 운용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한 경기만 패배해도 짐을 싸야하는 일정,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던 DEL PIERO가 다시 선발로 출전한 것입니다. 역시나 아무런 활약을 못하고 후반 78분 교체됩니다. 놀랍게도 교체된 선수는 공격수 'Enrico CHIESA'. 이탈리아의 공격자원 중에서 Christian VIERI와 함께 최고의 활약을 펼치던 Roberto BAGGIO는 벤치를 뜨겁게 데웠을 뿐입니다. 

 모든 선수들이 팀 전술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장려하고 당연하게 생각을 하는 이탈리아의 축구 문화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괜히 전술의 왕국이 된 게 아닙니다. 쉽게 얘기를 하면 전술에 선수가 맞춰야지, 선수에 전술을 맞추는 게 아니란 소리입니다. BAGGIO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Cesare MALDINI감독조차 이러한 모습을 보일 정도였으니, 사이가 좋지 않은 감독이라면 그를 어떻게 대접했을지 예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BAGGIO는 전략과 전술을 무시하며 자유로운 축구를 구사하는 선수였죠. 그렇기에 앞선 불이익을 커리어 기간 내내 감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홈팀 프랑스와의 8강전. Roberto BAGGIO는 다시금 버림을 받습니다.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던 DEL PIERO가 선발로 출전을 합니다. 경기는 프랑스가 지배를 했습니다. 다만 위대한 플레이메이커인 'Zinedine ZIDANE'만큼은 육탄방어와 존 마크를 통해 적절하게 막아낼 수 있었죠. 이 경기에서 등번호 6번 'Youri DJORKAEFF'의 활약이 특히 빛납니다. 그는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면서 이탈리아 선수들이 ZIDANE을 수비하느라 생길 수밖에 없었던 빈공간을 공략합니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계속된 공세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대표팀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긴 했습니다. 공격진의 심각한 골 결정력 부족 말예요. 이 경기에서 찬스를 다 날립니다. 

 여하튼 98년 월드컵 당시 프랑스의 포메이션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 안에 위치한 베스트 일레븐도 말이죠. 크리스마스 트리 포메이션을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장본인들입니다. 정말 무시무시합니다.(사실 공수의 조화가 보다 완벽하게 이뤄진 것은 유로 00대회에서의 프랑스입니다)

 

------------기바라쉬--------------

--------지단----- --조르카에프-----

--프티---------데샹--------카렘뷰--

-리자라쥐---데사이----블랑-----튀랑--

------------바르테즈--------------

 

---------기바라쉬---앙리-----------

--------------지단----------------

--프티------------------조르카에프--

--------------데샹----------------

-리자라쥐---데사이----블랑------튀랑--

-------------바르테즈--------------

 

 한편 이탈리아 공격진은 프랑스의 중원에서부터 시작되는 압박과 철의 포백에 의한 수비에 가로막혀 무기력한 플레이를 보여줬습니다. 연장 후반까지 프랑스 골문을 향해 날린 슈팅 숫자가 5개에 불과했죠.  

 이에 후반 67분경, 드디어 DEL PIERO와 Roberto BAGGIO가 교체됩니다. (기억에 의함)잊을 수 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BAGGIO가 그라운드 위에 들어설 때 모든 관중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낸 것입니다. 국가대항전인 월드컵, 그것도 홈팀 프랑스가 8강전의 상대이기에 자국인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한 상황, 게다가 BAGGIO가 프랑스의 클럽에서 단 1초도 뛰어보지 않았던 선수란 점 등을 고려해보시길. 과연 그 누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체를 통해 그라운드에 들어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을까요?  

 BAGGIO는 이탈리아 선수 중 전후반과 연장 전후반을 모두 합쳐서 가장 위협적인 슈팅을 프랑스 골문을 향해 날렸습니다. 그가 그라운드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이탈리아가 프랑스 수비진을 흔들기 시작한 셈이죠. 자신을 중용하지 않고 벤치에 앉혀뒀던 Cesare MALDINI 감독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하고도 멋진 항의의 표시였습니다. 실력으로 보여준다는 것, 이보다 더 멋진 복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BAGGIO의 슈팅장면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QNCYWnge9Rc

   

   

             승부차기 성공 후 보여준 유명한 세레모니

 

 승부차기에서는 첫 번째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킵니다. 그리고 유명한 골 세레모니가 나옵니다. 입술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댑니다. '더 이상 나를 9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승부차기에 실패한 비운의 스타라 얘기하지 말라'고 얘기를 하듯이 말입니다. 승부는 이탈리아의 마지막 키커 'Luigi DI BIAGIO'의 슈팅이 골대를 맞추면서 프랑스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이때 그라운드에 쓰러져있던 Luigi DI BIAGIO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넨 사람은 다름 아닌 Roberto BAGGIO였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Cesare MALDINI 감독은 Roberto BAGGIO에게 자신이 그를 중용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사과를 했습니다. 

이탈리아 대 프랑스전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XzzeGrU3vZg&feature=related

 

 

       인터 밀란에서의 로베르토 바조 

 98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그는 새로운 클럽에 둥지를 틉니다. 이번에는 회장과 감독 모두가 그를 환영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가 뛰고 싶어한 인터 밀란입니다. Roberto BAGGIO의 클럽 인생에 있어서 인터 밀란에서의 첫 해는 좋은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UEFA컵 6경기에 출전해 4골을 넣으면서 우승을 경험합니다. 비록 리그에서 1위를 못했고, 그의 경기력은 전성기에 비해 많이 떨어졌지만 말예요. 실제로 리그 경기에서는 23경기 출전에 5골 기록에 그쳤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인터 밀란의 감독이던 'Luigi Simoni'에게 '믿음에 부응하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더군요. 

 문제는 99/00 시즌에 발생하게 됩니다. 리그 2위와 UEFA컵 우승을 이끈 Simoni감독이 경질되고, 그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명장이자 Roberto BAGGIO의 가장 유명한 적인 Marcello LIPPI감독이었으니까요. 유벤투스에서 마지막 해에 경험했던 악몽이 반복됩니다. 그것도 더 심각하게 말이죠. BAGGIO가 말하길, 자신의 축구인생에 있어서 정신적으로 가장 버티기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Roberto BAGGIO는 그 시즌에 23경기에 출전했습니다. 당연히 선발이 아닌 교체선수의 대접을 받았죠. 그의 플레이가 팀워크에 도움이 안 된다는 등의 추문이 가장 극심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BAGGIO를 향한 계속된 LIPPI의 공격에 의해 그는 클럽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뛰고 싶어했던 그 클럽에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가져다준 두 골을 선물하고 말예요. 그의 인터 밀란에서의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Roberto BAGGIO의 인터 밀란에서의 활약상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4xzgIEQuvtM

 

 99/00시즌의 악몽으로 인해서 컨디션을 올릴 수 없었던 Roberto BAGGIO는 유로 00 이탈리아 대표팀에 합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목표인 02년 한일 월드컵 참여를 위해서 결단을 내립니다. 자신을 원하고 자신이 자유롭게 뛸 수 있는 클럽으로 이적하기로 한 것이죠. 

 브레시아, 작은 클럽이었습니다. 00시즌을 앞두고 1부 리그로 막 승격한 팀입니다. 사람들은 Roberto BAGGIO가 '다음 월드컵에 참여를 하기 위해 팀을 옮겼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상 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소규모 클럽에서 커리어를 마무리 지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허나 그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34세의 노장이 된 Roberto BAGGIO, 자신을 중심으로 꾸려진 최약체 팀을 이끌면서 그 팀을 8위에 올려놓은 것이죠. 특히 부상으로 2개월 동안 재활하다 그라운드에 돌아온 순간부터 하이라이트가 시작됩니다. 그는 골을 몰아서 넣습니다. 유벤투스, 인터 밀란, 피오렌티나 등의 강팀 역시 그 제물이었습니다. 강등권에 머무르던 브레시아의 순위는 그의 골폭풍과 함께 수직 상승하게 됩니다. 리그 25경기 출전 10득점, 모든 골이 그가 부상에서 복귀한 20라운드 이후에 나온 것입니다. 'Baggio's Brescia'란 애칭이 생긴 순간입니다. 

 01/02시즌이 진행되던 때, 당시 이탈리아의 대표팀은 명장 'Giovanni TRAPATTONI'가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는 BAGGIO를 절대로 자신의 스쿼드에 넣지 않을 것이라 밝힌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BAGGIO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면, 그도 나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노출시켰습니다. 리그 첫 아홉 경기에서 8골을 터뜨립니다. 35세 영웅의 위대한 행보, 여기에 절대 다수의 이탈리아 축구팬들과 언론이 TRAPATTONI 감독에게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BAGGIO를 국가대표 스쿼드에 넣어라!' 그러나 감독은 무시했습니다. 선발권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라는 매뉴얼을 읊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BAGGIO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합니다. 왼쪽 무릎 인대와 연골이 동시에 찢어진 것입니다. 시즌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부상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TRAPATTONI 감독은 언론 플레이를 시작합니다. 'BAGGIO도 스쿼드에 들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부상을 당해서 선발할 수 없는 것뿐이다.' 

 Roberto BAGGIO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 축구팬을 감동시킨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부상을 당한 후 76일 만에, 부상의 위험을 감수하고서 그라운드에 복귀한 것이죠. 많은 자국 팬들과 선수들이 '저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월드컵에 참여하려고 하다니 욕심이 과하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복귀전에서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두 골을 터뜨립니다. 다음 경기인 볼로냐전에서도 골을 터뜨립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BAGGIO의 불꽃 투혼이 크게 보도됐을 정도입니다. TRAPATTONI 감독이 당황했다는 보도 역시 나왔죠. 그러나 다음 경기에서 BAGGIO의 육신은 그의 정신을 배신합니다. 부상. 01/02시즌 12경기 출전에 11득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득점이 어디에 있을까요? 

 TRAPATTONI 감독은 수많은 사람들의 호소를 뒤로하고 Roberto BAGGIO를 자신의 스쿼드에 넣지 않았습니다. BAGGIO는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됐다는 상실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아시다시피 그해 열린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은 홈팀 대한민국에 일격을 당하고 16강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그 수많았던 이탈리아의 득점 찬스들을 생각해보시길. 과연 BAGGIO였다면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Roberto BAGGIO는 자신의 축구인생의 황혼기를 준비합니다. 세리아 A 200골 달성이란 마지막 목표를 세운 것도 이 무렵입니다. 02/03시즌에 그 목표를 이루게 됩니다. 26경기 출전, 12득점. 

 03/04시즌에 접어들면서 그는 은퇴를 언급합니다. 이제 정든 축구계를 떠날 시점이라 얘기하면서 말예요. 사실 포르투갈에서 열린 유로 04에 대한 열망이 있긴 했지만, TRAPATTONI 감독이 '대표팀에 BAGGIO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다시금 못 박은 상황이었기에 미련 없이 은퇴를 결정한 것이죠. 

 한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게 됩니다. 04년도 초, 대표팀의 많은 선수들이 대거 부상을 당했으니까요. 이러한 상황이 되자 Roberto BAGGIO의 오랜 지지자들은 그에게 자리 하나를 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TRAPATTONI 감독은 BAGGIO의 국가대표 은퇴경기를 앞두고 일종의 립 서비스를 날립니다. '대표팀 자리를 차지할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BAGGIO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황 반전, Roberto BAGGIO는 다시 한 번 마지막 불꽃을 하얗게 태웁니다. 이 멘트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Trapattoni가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말한 사실만으로도 내가 바라던 것 이상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번 경기(국가대표 은퇴경기. 2004년 4월 28일에 스페인과의 친선전이 열렸습니다)로도 너무 행복하다. 그렇지만 만약 다른 것(국가대표 승선)이 따라올 수 있다면 너무도 황홀해할 것이다." 

 '국가 대항전에서 우승을 하고 싶다'는 선수로서의 열망은, 오직 한 사람 Roberto BAGGIO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던 Trapattoni 감독의 립 서비스조차 믿게끔 만들었습니다. 대표팀 승선을 위해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했습니다. 그 결과, 노장 Roberto BAGGIO는 그의 선수 커리어 마지막 시즌 26경기에 출전 무려 12골 10어시스트를 기록하게 됩니다. 37세의 선수가 만든 기록입니다. 그의 불꽃투혼에 이탈리아 축구팬들은 다시금 감동을 받았고 미디어와 연합을 해서 Trapattoni 감독에게 '그를 뽑아야만 한다'라는 압력을 넣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Roberto BAGGIO는 결코 대표팀에 불리지 못했습니다. 대표팀 은퇴경기에서 입었던 아주리 유니폼은 국가대표팀에서 Roberto BAGGIO가 마지막으로 입을 수 있었던 푸른색 유니폼이 됐습니다.  

 유로 04에 참가한 이탈리아 대표팀은 최악의 플레이를 보여주다 예선탈락을 했습니다. 믿었던 'Francesco Totti'는 퇴장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Trapattoni 감독은 대표팀에서 물러납니다. 

  

 

                로베르토 바조의 은퇴 순간

 

 Roberto BAGGIO의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합은 AC밀란 원정 경기였습니다. AC밀란의 주장이자 그의 오랜 친구인 'Paolo MALDINI'는 시합 전부터 그와의 추억과 관련한 상념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BAGGIO가 '한 영웅의 퇴장'이라는 은퇴식을 준비하기 위해 후반전에 교체돼 그라운드를 나갈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서 포옹을 해준 사람도 다름 아닌 MALDINI였습니다. BAGGIO는 자신을 향해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산 시로를 가득 메운 팬들을 향해 박수를 치면서 드레싱 룸으로 사라졌습니다.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Roberto BAGGIO. 브레시아 홈에서 마지막 경기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hT33t-jwsAU&feature=PlayList&p=7318AA9624DB7EE9&playnext=1&playnext_from=PL&index=57 

Roberto BAGGIO. 현역 은퇴 경기. 상대는 AC밀란. 밀란의 주장인 위대한 Paolo MALDINI와의 감동적인 포옹.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BQZFRPGlH0I&feature=related

 

 분명 Roberto BAGGIO란 선수가 이룩한 성과물은 그 명성에 비해 보잘 것 없습니다. 대단한 우승트로피도 없으며 개인적으로는 득점왕과 같은 멋진 기록을 거의 남기지도 못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Roberto BAGGIO는 비운의 스타로 기억될 공산이 큽니다. 인정합니다. 9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의 승부차기 실축은 BAGGIO 스스로가 인정했다시피 평생 안고 가야만 하는 짐일 테니까요.  

 사실 Roberto BAGGIO는 인간이 가진 모든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그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그의 육신이 그의 정신을 따라갈 만큼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도 아니며, 자신도 모르게 추문에 휩싸여 심한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그는 악몽과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으며, 그것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에 아마도 평생 동안 BAGGIO란 이름 뒤를 쫓아다닐 것입니다.

 

                  The Divine Ponytail 'Roberto BAGGIO'

 

 전 그렇기 때문에 Roberto BAGGIO가 축구계의 그 어떤 영웅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줄 수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그의 축구인생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어떠한 역경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가 선명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당신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포기해라'고 아무리 말을 할지라도 '후회는 하지 말자. 최선을 다한다면 나는 할 수 있을 테니까'라는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웠던 사나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그것을 이루기 직전에 고꾸라졌든 심지어 자신의 꿈을 이룰 기회조차 갖지 못했든 상관없이 말예요.  

 Roberto BAGGIO의 꿈, 신이 그 실현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던 꿈. 그의 도전기엔 우리가 왜 이카로스의 후예인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그의 이름은 축구의 역사라는 신화 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http://serieaman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