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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S 유명인 이야기

주목의 새로운 감독들을 해부한다 - Andre VILLAS BOAS

by forzalazio 2011. 9. 5.



'무리뉴 2세'의 실체.

15m유로라고하는 거액의 위약금을 포르투에 지불하며 첼시가 새로운 감독으로 초빙한 안드레 비야스 보아스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무리뉴 2세'라고 불리는 33세의 신진기예의 "실체"를 쫓아본다.

text by NUNO LUZ
translation by Shin TOYOFUKU

프로필

풀네임 : 루이스 안드레 데 피나 카브랄 에 비야스 보아스
생년월일 : 1977년 10월 17일(33세)
국적 : 포르투갈
출신지 : 포르투(포르투갈)
가족 : 부인과의 사이에 2녀

약력
1994년 - 포르투의 스탭으로. 롭슨감독의 아래에서 정보수집담당
2000.3 - 영국령 버진제도대표감독에 취임. 통산성적은 2전 2패/득점 1ㆍ실점 14
2002.1 - 무리뉴감독의 아래에서 포르투의 어시스턴스코치로 취임. 대전상대의 분석을 담당
2004.6 - 무리뉴감독과 함께 첼시로. 대전상대의 분석을 담당
2008.6 - 무리뉴감독과 함께 인테르로. 대전상대의 분석을 담당
2009.10 - 아카데미카의 감독으로 취임. 11위로 잔류를 인도. 통산성적은 11승 9무 10패/38득점ㆍ35실점
2010.6 - 포르투의 감독으로 취임. 유로파리그, 포르투갈리그, FA컵 3관왕을 달성. 리그는 27승 3무로 사상 3번째 무패우승
2011.6 - 첼시의 감독으로 취임. 포르투에 지불했던 위약금은 15m유로로 파격적인 금액

타이틀 : 유로파리그 1회, 포르투갈리그 1회, 포르투갈컵 1회

16세의 소년은 논리정연하게 도밍고스의 기용을 설득했다.

안드레 비야스 보아스는 1977년 10월 17일, 포르투갈 북부의 항구도시 포르투에서 태어났다. 철이 들었을때부터 FC포르투의 팬이었던 안드레소년은 머지않아 클럽의 소시오(회원)이 되었고 회원번호 '11428'을 얻었다. 이 도시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남자아이가 자연스럽게 그렇게되는것처럼 그도 포르투의 열광적인 서포터로서 자라났던것이다.

유복한 일가였다. 아버지는 BMW사에서 일하고있었고 생활에 부자유같은건 없었다. 비야스 보아스가의 뿌리는 멀게는 영국에있고 안드레아의 아버쪽의 조모 마가렛 네빌 켄도르는 잉글랜드출신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영어를 마스터할수있었던것은 이 조모의 존재도 컸었다. 이러한 가족의 혈통, 그리고 조모에게서 물려받은 영어실력은 훗날 비야스 보아스가 축구의 세계에 몸을 던지는 계기를 가져다주는 바비 롭슨과의 만남을 만들어내기도한다.

안드레소년은 포르투, 그리고 축구선수를 꿈꿨다. 학교에서도 포르투의 선수에 관한 지식으로 그의 오른쪽에 설사람은 없었다. "안드레는 그때부터 감독의 자질을 갖고있었어요." 당시의 동급생은 그렇게 회상했다. 축구의 기사가 게재된 신문과 잡지를 열심히 사모으는 소년을 보고 가족과 주변의 어른들은 장래 스포츠저널리즘의 길로 나아갈것이라고 생각했었을것이다.

비야스 보아스는 당시부터 데이터와 통계학에 흥미를 가졌고 노트에 전술분석 및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는것을 좋아했다고한다. 여유가 생기면 컴퓨터로 향해서 '챔피언스 매니저'에 흥미를 느꼈다. 감독/GM이 되서 축구팀을 운영하는 이 시뮬레이션게임에 소년은 사로잡히게되었다. 자신의 손으로 팀을 만들고 전술을 짜고 경기에서 지휘봉을 잡는것이 무엇보다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인생을 크게 바꿔놓은 전환기가 찾아왔던것은 16세때이다. 당시, 가족이 있었던 주택가에는 포르투의 감독이었던 보비 롭슨도 살고있었고 만나면 인사를 교환하는 사이였다. 어느날 안드레소년은 과감하게 롭슨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그것은 선수기용에 관한것이었다.

"왜, 도밍고스 파시엔시아를 기용하지않는거죠?"

소년은 이 공격수에게 출전기회가 주어지지않는것을 납득할수없었던것이다. 여담이 되겠지만 은퇴후에 감독이 되었던 이 도밍고스가 브라가를 이끌고 비야스 보아스의 포르투와 지난시즌 유로파리그 결승에서 얼굴을 마주친것은 운명이었던것같다.(편집부ㆍ주/도밍고스는 다음시즌부터 스포르팅 리스본의 감독으로). 비야스 보아스는 막무가내로 도밍고스의 기용을 주장했던것은 아니었다. 그의 주장에는 확실한 지식이 부가된 분석이 있었고 깊은 전술적통찰이 있었던것이다. 16세의 소년은 명장 롭슨을 논리정연하게 설득했던것이다.

롭슨은 놀랐다. 계기도 없는 소년이 포르투의 전술을 냉정하게 분석해서, 이론화해서 도밍고스기용을 호소해왔기때문에 무리는 아니다. 감명을 받았던 롭슨은 안드레소년을 팀의 연습에 초청했고 눈을 빛내며 연습을 지켜보던 소년과 명장은 친밀한 관계를 쌓았던것이다. 롭슨은 관계자와의 만남에서도 비야스 보아스를 데려가게되었고 얼마지나지않아 정보수집이라는 일을 주었다. 그것은 소년이 축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된 순간이었다.

"Sir.보비는 제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비야스 보아스는 롭슨과의 만남을 감개무량하듯이 이렇게 회상했다. "롭슨이야말로 모든 계기를 가져다준사람이죠. 축구세계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 은인입니다. 실은 그때까지는 쭉 스포츠저널리스트가 되고싶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그와 만나게된것으로 감독으로서의 길을 개척할수있었죠.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때는 터무니없을정도로 실례를 저질렀어요. 롭슨의 넓은 마음에는 감사하지않으면안되겠죠. 보통이라면 그런 시건방진 16세는 문전박대를 당했을거에요."

그다지 알려지지는않았지만 비야스 보아스는 선수로서의 짧은 커리어도 보낸적이있다. 소속클럽은 라마르덴세. 포르투시내에 있는 작은 클럽이다. 얼마전에 취재했던 당시의 팀메이트는 입을 모아서 비야스 보아스를 이렇게 평가했다. "안드레는 교양있고 언제나 어른스러운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안에는 뜨거운것을 감춘 타입이며 리더쉽이 있었다. 피치위에서 동료에게 전술과 포지셔닝등을 세세하게 지시를 내리고 경기에서 패배하면 화를냈다. 평소에는 냉정한 그가 패전후만큼은 감정을 드러낸다라는것.

몸의 한계도 깨달았을것이다. 대학의 강의와 포르투에서의 시간을 보다 소중히하고싶었던 비야스 보아스는 현역생활을 단념했고 그리고 지도자의 길로 나아갔다. 롭슨의 권유로 잉글랜드로 건너와서 중서부 릴샬에 있었던 국립스포츠센터에서 유학. 그뒤 스코틀랜드축구협회에서 지도자강습을 받아 UEFA의 라이센스를 취득했다. 실제 연수는 입스위치타운에서 쌓는등 지도자로서의 기초를 잉글랜드에서 쌓았다. 일가의 혈통, 롭슨과의 만남, 그리고 그뒤 2번에 걸친 첼시와의 만남을 생각해보면 비야스 보아스와 잉글랜드는 끊을래야 끊을수없는 운명적인 뭔가로 연결되어있었을지도모른다.

신문의 광고를 보고 신청했던 영국령 버진제도의 대표감독이 되었던것이 21세때. 하지만 이 모험은 오래가지못했다. 그는 포르투갈로 돌아오던 그날 자신이 겨우 21세라는것을 고백했던것같다.


철저한 정보수집과 분석은 최첨단을 달리는 "혁신"이었다.

포르투로 돌아와서 스쿨부문에서 일을 찾았던 비야스보아스에게 두번째 만남이 찾아왔다. 2002년 1월, 한명의 남자가 포르투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조세 무리뉴다. 둘은 이미 알고있었다. 무리뉴는 주지고있는것처럼 롭슨의 아래에서 어시스턴트를 맡았고 비야스 보아스와는 함께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였다. 무리뉴는 즉시 그를 스탭으로 불러들였다. 롭슨과 마찬가지로 무리뉴도 젊고 우수한 인재를 알아채는 눈을 갖고있었다.

무리뉴는 비야스 보아스를 분석관으로 중용했다. 그때까지 포르투갈에서는 데이터를 활용해서 대전상대를 분석하고 경기에 활용한다는 사고방식같은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리뉴와 비야스 보아스는 혁신적이었다. 상대를 발가벗기는 철저한 데이터수집과 상세한 분석은 시대의 최첨단을 달리는것이었다. 비야스 보아스는 매우 우수한 스파이였다. 다음에 대전할 팀의 연습장에 잠입해서 연습메뉴부터 선수개개의 움직임까지 있는 모든 정보를 입력했다. 무명이었던 그가 포르투의 관계자라고 신경쓰는일같은건 없었다고한다.

이렇게해서 갖고돌아온 정보는 정리되서 무리뉴의 앞에 올려졌다. 포르투의 선수들이 당시 이런 농담을 주고받았던것을 나는 기억하고있다. "대전상대에 대해 비야스 보아스가 모르는일같은건 없지. 유일하게 호텔의 방배정을 제외하고." 비야스 보아스는 상대팀 선수의 성격, 어떤 도발에 말려들기 쉬운가같은것까지 철저하게 조사해서 자기팀의 승리를 위해 활용했다.

당시 비야스 보아스의 주변에 있었던것은 무리뉴가 만들어낸 가족이라고 말할수있을정도의 깊은 인연을 가진 기술스탭진이었다. 골키퍼코치 시우비뉴, 어시스턴트발테마르 브리또, 피지컬코치 루이 파리아. 무리뉴는 문자그대로 가족 전체의 교제를 통해 하나의 바위같은 약속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양성된 절묘한 하모니가 포르투, 첼시, 그리고 인테르밀라노에서의 성공을 가져다준것이다.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서 오퍼를 받자 런던행을 결심한 무리뉴가 취임조건으로 이 러시아인 오너에게 요구했던것은 비야스 보아스를 시작으로한 스탭을 함께 고용하는것이었다.

비야스 보아스는 잉글랜드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무리뉴정권이 발족된 2004-05시즌, 첼시는 개막전에서 빠르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맞붙는 스케줄이었다. 무리뉴는 이 개막전이 전부라고 판단했고 비야스 보아스에게 철저한 분석을 지시했다. 명을 받은 그는 유나이티드에 밀착. 미국원정까지 따라가서 라이벌의 모든 정보를 수집해서 상세한 레포트를 작성한뒤 무리뉴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첼시는 개막전에서 유나이티드를 격파(1-0), 머지않아 하나의 시대를 쌓아올리게된것이다.

이 시즌의 반정도 지났을때의 일이다. 영국의 어느 신문의 보도로인해 비야스 보아스의 일이 폭로되었다. 흘렸던 그의 분석레포트(뉴캐슬 유나이티드가 조사대상이었고 그 일부를 오른쪽에 별도로 게재)는 매우 깊숙한곳까지 파고들고있었다. 선수의 장점 및 버릇, 자신들이 돌파해야할 상대의 약점. 공수의 메카니즘, 코너킥과 프리킥의 패턴. 프리킥을 찰때 상대의 벽은 점프하는가까지 그곳에는 적혀있었다. 축구관계자들을 하나같이 경탄하게했던 질이 높은 레포트였다.

당시, 그는 인디펜던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일은 조세(무리뉴)에게 대전상대의 상태를 보고하는것. 선수 한명한명에 대해 좋은 컨디션인가, 그렇지않은가, 전합니다. 숨어서 상대의 연습장으로 갑니다. 상대선수의 심신양면의 컨디션을 철저하게 조사하기위해서죠."

무리뉴의 충실한 오른팔이었던 비야스 보아스에게도 꿈이있었다. 롭슨과 무리뉴처럼 감독으로서 자신의 팀을 이끌어보고싶다. 그렇게 원했던것이다. 결단했던것을 인테르에서의 첫해를 마쳤던 2009년 여름이었다. 꿈에 도전하고싶다고 무리뉴에게 보고하며 사임허가를 얻어낸 비야스 보아스는 새로운 감독을 찾고있었던 스포르팅의 면접을 받았다.

스포르팅에 뭔가 성이차지않았던것일까. 스스로에게 뭔가 아이디어가 있었던것일까. 그것은 면접이라기보다 비야스 보아스의 프리젠테이션이었다. 스포르팅과는 인연이없었지만 머지않아 오퍼가 들어왔다. 성적부진으로 로제리오 곤사우베스감독을 경질한 아카데미카 코임브라의 유혹이었다. 2009년 10월, 감독으로서 본격적인 커리어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최하위로 부진했던 아카데미카를 멋지게 되살리며 11위로 여유있게 잔류로 이끌었던 비야스 보아스는 그의 성과를 높게 평가받아 2010년 여름 드디어 염원의 직장을 얻었다. 사랑하는 포르투의 감독으로 초빙되었던것이다. 지난시즌은 지금이라면 말할것까지도없을것이다. 첫해에 모든 타이틀을 얻어낸 그는 일약 시대의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77-78시즌 벤피카 리스본 이래가 되는 리그 무패우승이라는 쾌거를 달성했고 유로파리그를 제패한 비야스 보아스에게 반했던것이 첼시의 아브라모비치였다.

첼시행은,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간단한 결단은 아니었다. 첫해의 성공을 토대로 포르투를 한층더 높은곳으로 이끌고싶다, 그렇게 생각했던것이다. 조르지오 마누 핀투 다 코스타회장의 취임 30주년이라는 뜻깊은 시즌이 된다는것도 염두에 있었던것같다. 실제로 잔류를 선언했고 시즌종료직전에는 선수들에게도 팀에 잔류하도록 요구했다고한다. 그럼에도 첼시에서의 두번째 모험은 버리기어려운것이었다. 상대편의 프로젝트를 듣고 그의 마음은 서서히 잉글랜드로 기울어갔다. 덧붙여서 연봉은 5m유로. 감독으로서 처음으로 손에 넣었던것이 300유로이기때문에 1000배이상의 증액이다. 숙고의 숙고를 거듭한끝에 비야스 보아스는 결단을 내렸다. 포르투를 떠나서 첼시의 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을 드디어 굳혔던것이다.


피치바깥에서도 대화를 나누며 선수개개와 신뢰관계를 쌓다.

그러면 비야스 보아스는 대체 어떤 감독인것일까. 첼시를 어떻게 이끌어갈것인가.

우선 말하고싶은것이 선수와 친밀한 관계를 쌓는 타입이라는것이다. 각자에게 영향을 주는말을 메모해서 경기전에 선수 한명한명에게 전달한다. 팀 전체의 결속을 강하게다지고 사기를 높히기위해 라커룸에 신문과 잡지를 오려낸것으르 붙인적도있다. 선수와는 사생활에 대해서도 빈번하게 대화를 나누며 신뢰관계를 쌓아나간다. 유로파리그를 제패했던 환의속에서 들었던 골키퍼 에우톤의 말은 흥미깊었다. 비야스 보아스란 어떤 존재인가. 그렇게 질문받은 수호신은 '친구'라고 짧게 대답했던것이다.

첼시라고하는 클럽을 피부로 알고있다는것, 영어에 능하다는것은 비야스 보아스에게 있어서 큰 어드밴티지가 될것이다. 프랑크 람파드와 존 테리와는 지금도 관계가 깊다는것역시. 비야스 보아스는 무리뉴가 그랬던것처럼 첼시에 영광을 가져다줄것이다. 견고한 수비조직, 전방에서의 압박, 콤팩트한 라인을 스탬포드 브릿지(첼시의 홈구장)에서 다시 볼수있을것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바르셀로나의 호셉 과르디올라감독를 존경하는 비야스 보아스는 현재의 바르샤의 진수도 도입하려고할것이다.

그것은 무리뉴가 첼시에 구축했던 4-3-3도 모든것을 제패햇던 지난시즌의 포르투의 4-3-3도 아니다. 오리지널을 완성시켜야할것이다. 비야스 보아스는 마치 입버릇처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16세때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감독을 하는것은 앞으로 10년뒤면 좋겠다고." 33세의 젊은 감독은 5년만에 되돌아온 런던에서 어떤 수완을 보여줄것인가. 비야스 보아스의 신생 첼시는 지금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을뿐이다.


출처 : 월드사커다이제스트 2011년 8월 4일자.
번역출처 : http://www.serieamania.com/xe/calcioboard/6718541